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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영 칼럼] 가을이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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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영 칼럼] 가을이 짧다

 ‘가을이라구?’ 코로나19로 얼굴 반쪽을 가리고 살던 시절, 계절이 이렇게 빨리 돌지 않았던 것 같았는데 지나버린 시간의 착각일까. 가로수의 은행잎이 아직도 파란데 아침에 코트를 입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는 날씨가 기이하기까지 하다.

어쩌면 시간과 계절은 한 세계의 주인이다. 그것은 나뭇잎이 나무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무심하다. 잠깐 잊어진 허상처럼 금새 시간을 잃어버린다. 가을비가 미적지근하게 분산되고 가을이 주는 언어가 분열되고 퇴화하며 그리움까지를 기억 속에 흔들어버린다. 산의 단풍도 이렇게 오는 계절을 속절없이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순간이다. 어느 해(年)를 닮으려는 표절이다. 그것은 마치 당나귀가 지탱할 수 없는 짐을 짊어지게 함으로써 당나귀를 죽이는 일과 마찬가지고 무엇을 운반한다는 핑계로 남의 수레를 부수는 일이다. 

생명은 내게 가르쳐주었다. 팔다리가 잘린 육체에는 진정한 고통이 없다고. 죽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반항은 인간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성전의 규모에 비례하여 확대된다. 지금 가을이 반항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꿈이 부조리하게 부서지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자연스러움으로 자기 내면의 율동을 표현한다. 

모두가 옳다. 다만 상대편이 옳다는 것을 이해할 만큼 우리의 각오가 높은 산꼭대기에 오르지 못한 것뿐이다.  만일 서로 욕하고 싸우며 서로 죽이기 시작한다면 모두 이룰 수 없는 언어에 대한 욕망 탓일꺼다. 이러다가도 가을의 푸념이 사라지고 서로 더듬거리며 대화를 나눈다면 나는 용서를 해주리라. 유난히도 더웠던 여름의 숨막히는 한날에도 이런 바람은 기억할 수 없었다. 이제 식약저널의 한 호(號)를 뼈 아프게 만들어 세상에 보내려고 한다. 도저히 가을을 비켜 갈 수 없는 조바심이라면 당당하게 드러내야 한다. 

오늘도 조심스럽게 질문해 본다. “오늘은 어떤 질문을 해야 하나요?” 위대한 답은 위대한 질문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믿으면서 말이다. 답은 질문과의 관계에서 무한한 만족감을 느낀다. 애증의 양면성에서 해방된 가장 완벽한 관계다. 어쩌면 찬 바람이 부는 함축된 계절의 속마음은 지난날의 고독한 상흔인지도 모른다. “담쟁이에 붙어있는 잎새 말이야 마지막 한 잎이 떨어지면 나도 가는 거야” 폐렴을 가진 희망이 내지르는 가냘픈 목소리는 나뭇잎처럼 흔들리지만 마지막 잎새는 사다리와 흩어진 붓 몇 자루, 그리고 노란색과 녹색 그림물감을 푼 팔레트가 붙들고 있었다. 아무리 거센 폭풍이라도 그 의지를 꺾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가을은 짧고 가지 않은 가을을 남긴다. 

사실 우리에게는 긴 시간이었다. 비대면의 순간에서 가느다란 숨은 가빴고 거칠었다. 사람을 만나 인터뷰도 하고 사진도 찍으며 웃음을 볼 수 있는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여름은 더웠고 땀은 가을을 기다렸다. 옷을 만지작거리며 크라우칭 스타트에 발을 딛고 있었다. 벌써 휘슬이 울리고 가을은 나를 앞지르며 바람의 흔적을 남긴다. 이제 남아있는 가을은 들녘을 물들이고 풍성한 열매를 남길 것이다. 우리의 덕지덕지 묻은 손때를 훈장처럼 걸고 식약저널의 가을은 짧지만 모든 것을 품고 신나게 달려갈 것이다. 오래 기다렸던 연인을 만나는 낭만의 플렛폼에서 멋쩍은 미소를 띠면서 말이다. 그래서 늘 오는 계절이 설레는지도 모른다. 또 다른 기다림으로~

이 준 영 박사

낙타방송 대표이사
식약저널 발행인
한국성시문학회 이사장
한국신문방송총연합회 이사장
선거전략연구소 피플플러스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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